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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소의 긴글통
타래 2019 본문
나는 마르크스에 대해 잘 모르지만
나는 마르크스에 대해 잘 모르지만 (진짭니다. 믿어주세요) 마르크스뿐만 아니라 당대 자본주의를 바라본 거의 모든 학자들이 손꼽은 당시의 괄목할만한 특징은 바로 '분업'이었다. 마르크스는 그 분업을 바라보며 비교적 젊은 나이에 『경제학-철학 수고』를 썼고 '소외'는 바로 여기서 등장한다. 그런데, 과연 마르크스가 분업이 소외를 일으키기 때문에 분업을 철폐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하면 나로선 그건 의문이다. 왜냐하면 이후 그의 작업은 '소외' 대신 생산력과 생산관계 간의 모순관계에 집중하는데, 공산주의는 자본주의적 생산력이 확보된 이후의 생산관계로 설정되기 때문이다.
나는 이 문제가 마르크스를 해석하는 아주 유구한 문제(나는 '『경철수고』와 『자본』 싸움붙이기'라고 이름붙이고 싶다)와 맞닿아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배웠던 대부분의 선생님들은 어떻냐면 "교조적인 『자본』에서 20세기 초 재발견된 『경철수고』의 마르크스로" 이행하는 경향이 있다. 근데 사실 마르크스의 진행은 거꾸로다. "『경철수고』의 철학적이고 어쩌면 인본주의적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 마르크스에서 유물론적이고 (소위) 과학적인 『자본』의 마르크스로" 이행한 것이 순서다. 그렇게 생각하면 달리 생각해야 할 문제들이 등장하지 않나 그렇게 생각한다.
“초기 마르크스와 후기 마르크스를 임의적으로 대립시키는 이 주장을, 초기의 철학 저서들을 선호하는 사람들과 『자본론』의 마르크스만이 유일한 마르크스라는 사람들 모두 옹호했다.” - 무스토. (2011). 마르크스 소외 개념에 대한 재논의. 마르크스주의 연구, 8(2).
KCI 📑 무스토. (2011). 마르크스 소외 개념에 대한 재논의. 마르크스주의 연구, 8(2).
카페인이든 알코올이든 냉수든 가져다 놓고
개인적으로 인터넷에서 이루어지는 논쟁은 유의미하기가 거의 힘들다고 본다. 서로에게 유의미한 논쟁을 만들어낼 수 있는 공통의 프로토콜을 인터넷 환경이 충분히 제공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서로의 모든 논의를 공약불가능한 것으로 치환하기 마련이다. 개인적으로 진짜 그런 논쟁은, 서로 직접 만나서 사이에 카페인이든 알코올이든 냉수든 가져다 놓고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럴 수 있는 경우보다 없는 경우가 훨씬 많지만 적어도 그 비슷한, 서로 웃음 정도는 공유할 수 있는 (가상이든 아니든) 장이 마련이 되어야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인터넷에서 뭔가 의미있는 그런 논쟁이 되려면 당사자간에 그런 프로토콜이 있어야 한다. 게임에 비유를 하자면, 최소한 서로 연결이 되어야지 중간에 갈려서 각자 CPU랑 붙어놓고 그걸 대전을 했다고 우길 수는 없는 노릇이니.... 공통의 프로토콜도 그렇지만, 웃음 이야기를 했으니 말인데 오프라인에서는 상대가 웃는 걸 보고 여러가지 정보를 동원해서 저게 함 잘해보자는 웃음인지 날 멕이는 웃음인지 제법 알 수 있다. 서로 공유된 규범 없는 온라인 논쟁에선 그런거 개뿔 없고 상대의 웃음은 곧 얄짤없는 비웃음이 된다.
"영리한 녀석들은 많이들 반성하라고 하세요"
"훗날 누구보다도 날카로운 태평양전쟁 비판을 전개한 저명한 중국문학 연구자 다케우치 요시미(竹内 好) 조차도 다음과 같이 환호했다. - 역사는 창조되었다. 세계는 하룻밤 사이에 변모했다. 우리는 그것을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감동으로 어지러움을 느끼며 무지개처럼 흐르는 한줄기 빛의 향방을 목도했다. (중략) 지금까지의 무지를 부끄럽게 생각한다. 우리는 이른바 성전의 의의를 망각해 왔기 때문이다. 동아 건설의 미명 하에 약한 자를 괴롭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해 왔던 것이다. 우리 일본은 강한 자를 두려워한 것이 아니었다."
예전에 읽었던 글에 인용된 문구인데 읽을 때마다 참....
"고바야시는 패전 직후 열린 좌담회에서 자신의 전쟁 협력을 반성할 뜻이 없음을 강한 톤으로 설파한다. - 저는 정치적으로는 무지한 한 국민으로 사변에 대처했습니다. 입을 다물고 그랬죠. 아무런 후회도 없죠. 대사변이 끝나면 반드시 만약 이러저러했다면 사변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야, 사변은 이렇게는 안 됐을 거야 따위의 논의가 이뤄집니다. 그것은 필연이라는 것에 대한 인간의 복수입니다. 허무한 복수죠. 이 대전쟁은 일부 사람들의 무지와 야심에서 일어났을까요? 그것이 없었으면 일어나지 않았을까요? 나는 도저히 그런 경박한 역사관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나는 역사의 필연성이란 더 공포스러운 것이라 생각합니다. 나는 무지하니까 반성 따윈 하지 않겠습니다. 영리한 녀석들은 많이들 반성하라고 하세요."
KCI 📑 김항. (2015). 일반논문 : 말기의 눈과 변경의 땅 -1930년대 고바야시 히데오의 비평과 만주 기행문. 사이, 19(-), 155-186.
세월호란 해석불가능한 존재
문득 든 생각인데, 보수야권이 세월호 사건에 대해서 ‘정치투쟁으로 변질된 교통사고’를 넘어서는 어떤 해석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이들에게 세월호란 허깨비다. 실재하지 않으니 해석할 수도 없고 해석할 필요도 없다. 앞으로도 이들에게 세월호란 해석불가능한 존재로 남을 것이다.
실망하려면 기대가 있어야 한다
조국 이슈에 대해 어떤 언론에선 “정말 가난한 이들은 이 문제에 신경쓰지 않는다. 결국 ‘중산층의 공정함’ 이슈일 뿐”이라는 식으로 다루고 있는 듯하다. 이해는 가지만 두 가지 이유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인식이다. 첫째로 이러한 발화가 가난을 동원하는 형태로 이루어진다는 점, 둘째로 ‘신경쓰지 않는다’는 것이 전적인 무관심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 그들 자신의 배제를 재확인하고 정치 과정에 대한 냉소를 강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이다. 부유하지 못한 이들일수록 자신의 조건으로 인해 도덕적인 행동을 포기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이들이 조국을 바라보았을 때에는 “잘 사는 사람도 저렇게 해야 하는구나”라는 구조에 대한 냉소, 그리고 “나는 그러지 못하는데 저들은 그럴 수 있음에도”라는 분노가 각자 혹은 함께 작동한다.
지난 몇 주동안 조국 이슈에서 ‘가족’을 몇 번이나 보았는지 모르겠다. 학력자본의 전화에 충실했던 조국의 가족, 서로의 논문에 이름을 올려주는 학계의 ‘가족’, 선수를 치기 위해 내달린 검찰의 ‘가족’, 거기에 살짝 얹어 자녀보다 사과가 빠른 장제원의 가족.
촛불'혁명'에 대한 지인의 짧은 글을 읽었는데, 사실 2016년 촛불시위는 촛불 '혁명'이라 불리곤 하지만 어디까지나 헌정질서 수호를 위한 집회였지 구조의 근본적 개혁이 그 집회의 중심이었던 적은 없었다. 오히려 그것은 당시 촛불 시위의 '목표 달성'을 위해 뒷켠으로 밀려났었지 않았던가. 그런 점에서 문재인 정부는 아주 충실한 "촛불 정부"인 셈이다. 조국 정국이 보여준 것은 바로 문재인 정부가 처한 한계이자 아이러니였을 따름이다. 그 한계에 대해서 이야기할지, 한계를 한참 앞두고서의 의지에 대해 이야기할지, 아니면 그 한계'에도 불구하고'라는 접속사를 붙일지는 나도 알 수 없는 것이고, 각자 스스로 물을 일이겠지만 적어도 그 한계의 존재를 알아야 할 필요를 느낀다.
촛불집회를 ‘촛불혁명’이라고까지 평가하는 분도 있었지만, 본질적으로 그것은 체제수호의 운동이었다. 그런 점에서 문재인 정부는 촛불집회의 가장 적법하고 정당한 계승자일 것이다. 실망하려면 기대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실망이 그닥 크지 않다.... 애초에 한국은 정치가 우선하는 상황이 아니다. 굉장히 소용돌이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정치적으로 매우 안정적인 국가다. 몇 개의 구조들이 안전핀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소미아가 참 재미있는 상황인 것 같다. 우발적인 요인들로 안전핀이 뽑히는 걸 보는 건 몹시 스릴넘치는 일이 될 것이다. 😇
가능태의 가능태
어느 에피소드였는지 기억이 안 나는데, 역사공작단 팟캐스트에서 아라쌤이 이런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역사학은 모든 사건에 그 사건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구조를 찾아야 하는 작업이지만 그로 인해서 결국 현실에 엄연히 존재하는 우연성을 과소평가하게 되기도 한다고.
미시사의 방법론에서 구조는 행위자의 행위 속에서 비로소 행위자를 한정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행위자들에게는 우연이 작용한다. 아마 조커라는 캐릭터는 근대적 이성이 인식할 수 없는 우연성이 우리에게 주는 공포를 극대화한 존재가 아닐까. 그래서 그 ‘기원’ 따위는 의미가 없어야만 하는 것이다.
나는 문학을 역사의 안티테제처럼 여길 때가 있다. 역사가 현실태에 대한 인식이라면 문학은 가능태를 향한 탐구가 아닐까. 그래서 조커의 기원 같은 이야기는 ‘가능태의 가능태’ 같은 농담이 아닐까 싶다. 조커의 기원에 대해 사람들은 여러가지 개연적인 이야기를 덧붙이고 싶어한다. 아마도 그것은 결국 우리 사회의 공포를 덧붙이는 것에 그치고 말 것이다. 배트맨과 조커, 두 캐릭터와 그들의 이야기는 항상 모던한 면이 있고 그 점이 매력인 것 같다.
누군가 기꺼이 다른 불행한 사람을 끌어넣어야만 한다면
작은 공사판에서 내가 아침에 했던 작업은 절삭기로 철근을 자르는 일이었는데, 철근은 잘릴 때마다 불꽃을 튀기면서 바지에 구멍을 숭숭 뚫어놓는다. 나는 곤궁함은 그런 구멍 비슷한 거라고 생각한다. 일이 끝나고 나면 그제서야 그 구멍으로 바람이 드나듦을 깨닫는다. 그래서 노동자들이 여름에도 두꺼운 바지를 입고 작업하는 것이었고, 그것은 작업복을 여간하면 새로 사 입지 않는 이유이기도 했다. 낡은 작업복 때문에 능률이 떨어져도 상관없다. 일을 빨리 마친다고 해도 내 작업일이나 줄어들고, 몸만 더 쑤시고 더 많이 다치기만 할 뿐이라면.
많은 노동자들은 번 돈을 어처구니없는 곳에 쓴다. 알코올 중독자도 많고, 도박이나 성매매에 빠져있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또 많은 노동자들은 어딘가에 돈을 쏟아부어야 하는 사람들이다. 부모의 병원비, 자녀의 교육비, 터무니없는 빚.... 또 그 속에서도 새로운 삶을 모색하는 사람들도 있다. 향상심은 그것이 설령 자유주의적이라고 해도 가치있다. 사람의 의지는 그만큼 빛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이 굴레 자체를 가리키는 일은 반드시 필요하다. 한 명의 강인한 사람이 가까스로 빠져나온 구렁텅이에, 누군가 기꺼이 다른 불행한 사람을 끌어넣는다면, 끌어넣어야만 한다면 이 세상의 불행은 변하지 않는다.
판단 중지
회색 지대를 함부로 이야기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프리모 레비의 글을 읽히고 싶다. "나는 '화장터의 까마귀들'(존더코만도스)에 대한 이야기를 연민과 준엄함을 동시에 가지고 성찰해보기를 요청한다." "내가 보기에는 바로 이것이 진정한 '명령에 따른 강제 상태'이다. 심판대에 끌려나온 나치주의자들과 그 후 많은 다른 나라들의 전범들이 체계적이고 뻔뻔스럽게 들먹인 그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의 아이히만』도 회색 지대에서의 판단 중지를 요청한 글이 아니었다.
어제 쓴 글에 덧붙여서. 프리모 레비는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의 「회색지대」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억압당하는 환경이 면죄부를 주는 것은 아니다. 또한 종종 그 죄가 객관적으로 무겁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그에 대한 심판을 맡길 만한 인간의 법정을 알지 못한다." "나는 누구든지 감히 심판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 솔직하게 추론적 실험을 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중략) 수년을 게토에서 만성적 배고픔과 피로, 혼잡한 난리통과 굴욕감에 (중략) 그러고는 결국 해독 불가능한 어떤 지옥의 별들 사이에 내던져졌다고 상상해보라."
그러나 그것은 존더코만도스의 몫이었다. 어제 쓴 글에서와 같이 레비는 그것이 진정한 "명령에 따른 강제상태(Befehlnotstand)"라고 적는다. 그리고 그것은 명백한 가해자들이 자신의 죄를 변명할 때 동원되었던 말이었다. 레비는 쉬운 심판을 내리기 전에 판단의 유보를 요구한다. 그래야만 강제수용소의 카포(관리자 죄수)와 존더코만도스(유대인 시신을 처리하도록 조직된 유대인 죄수들)에 대해, 그리고 나치에 의해 '유대인의 왕' 행세를 한 룸코프스키 등을 세심하게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요구한 것은 판단 유보였지 판단 중지가 아니었던 것이다. “특수부대를 기획하고 조직한 것은 국가사회주의의 가장 악마적인 범죄였다. 이러한 기관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정확히 말하자면 희생자들에게 죄의 짐을 떠넘기려고 시도한 것이다.” “이 체제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매우 단단한 도덕적 뼈대가 필요하다.”
구조를 이야기하지 않으면서
무맥락의 트윗을 할 때도 있지만 나의 대부분의 트윗은 어떤 맥락을 상정한 상태로 하는 경우가 많은데, 갑자기 그에 대한 설명을 필요로 하는 순간이 오면 그 맥락의 A부터 설명할 수가 없어서 막막해지는 순간이 있다. 그래서 되먹지않은 비유를 들어야 할 때도 있다. 임지현 식의 논의는 아니더라도, 나치 독일이나 군국주의 일본의 민중들, 혹은 신민들에게 잘못이 있다면 그 내용은 무엇이 될까. 쉬워 보이기도, 또 너무 어렵기도 한 이야기다.
내가 프리모 레비를 자주 입에 담는 것도, 그가 이런 문제를 정말 탁월하게 천착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가 "나는 그(회색지대)에 대한 심판을 맡길 만한 인간의 법정을 알지 못한다"고 쓰면서 동시에 명백하게 "그렇지만 노골적인 판단을 내리지 않으려는 나의 이런 태도가 무분별한 용서로 받아들여지지 않길 바란다"라고 적는 것은 모순이 아니라 그 자체로 타당한 것이다. 그가 독일인들로부터 받은 편지들에 대한 글들이 그의 생각을 잘 보여준다.
그래서, 어쩌면 따분하게도, 내 생각은 다시 구조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구조를 이야기하지 않으면서 ‘중립’의 불편부당함에 기대는 것이 잘못이라면, 구조를 이야기하지 않은 채 개인에게 편듦의 짐을 지우는 것도 부당할 것이다.
"삶에 도움되지 않을 사람과는 만나지 말라"
어느 분인지 기억은 안 나지만, 타임라인에서 "삶에 도움되지 않을 사람과는 만나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신 분이 계셨던 것 같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 동네 친구들을 집에 놀러오지 못하게 쫓아내셨던 아버지 생각이 난다. 저런 애들에게 배울 것 없다고.
초등학교 전학을 와서 동네에서 처음 만난 친구가 있었다. 그 당시에는 잘 느끼지 못했지만 집이 많이 불우했었다. 그럼에도 장난을 잘 치고 웃음이 많은 친구였다. 언젠가 우리 집에 놀러온 적이 있는데, 방에서 뛰어놀다가 책장이 엎어진 적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우리 잘못은 아니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나와 그 아이까지 매질(!)을 해서 혼을 내셨다. 그러고는 저런 애들과 어울리지 말라고 하셨다. "머리 빈 놈들하고 놀면 같이 머리가 빈다"고. 그런데 그 친구는 그런 혼쭐이 났으면 나랑 놀지 않을법도 한데, 부모님 안 계실 때마다 우리 집에 '방 창문으로 드나들며' 놀러오곤 했다. 그 친구랑은 함께 가깝게 지내다가도, 언젠가는 서로 오해가 겹쳐서 2년 정도는 서로 싫어하면서 남처럼 지내기도 하다가 중학생이 되서는 다시 화해하고 그러면서 지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친구는 항상 내게 많은 배움을 주었다. 잘못한 것 하나 없으면서 내게 사과도 먼저 했다. 일찍 철들었고, 학교 공부에는 좀 젬병이었지만 생각은 언제나 사려깊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누구보다 먼저 아는 그런 친구였다. 어릴 때의 멋진 재치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고.... 지금은 서로 삶의 공간이 너무 멀다보니 자주 연락하진 못하지만 정말 소중한 친구 중 한 명이었다고 생각한다. 삶은 길고 '도움'의 종류는 많다고 생각한다.
근묵자흑이라는 말이 때로는 필요할 때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삶에 도움되지 않을 사람과는 만나지 말라"는 말엔 그닥 동의하지 않는다. 사람은 생각보다 자기 삶도 모르고, 무엇이 도움인지도 잘 모른다. 무엇보다 사람은 사람을 너무 모른다.
게임은 그야말로 자본의 품 속에 흠뻑 빠져 있기에
책을 읽다가 문득 이 글이 생각났다. 지금 보니 참 기분이 복잡해진다. 오늘날 게임은 예술종교(Kunstreligion)의 경지에 다다른걸까? 그리고 이제 10대 백인 소년이라는 제사장이 필요한 거고? 바그너가 말한 종합예술은 사실 오페라가 아니고 게임이었을까?
게임이 예술보다 마약 같은 것에 더 가깝다는 말에 나는 제법 동의하는 편인 것 같다. 사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다른 여러 대중문화 형식들보다도 훨씬 더 아도르노가 말하는 대중문화(Massenkultur)의 특징들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다른 형식들에서 (만일 이루어진다고 한다면) 이루어지고 있는 ('총체성'의 달성이나 '현실의 구제', 혹은 '지양'... 어떤 말이 되었든 그것들이 함의하는, 그 어떤 진리를 향한 몸짓?들로서) '예술하기'가 게임에서는 몹시 추구하기 어려운 기획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도르노에 대한 중요한 비판 중 하나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과 깊게 상호작용하는 문화 형태는 "자신의 사회적 존재 조건을 비판하고 진리에 응할 가망이 자동적으로 줄어든다고 잘못 가정하는 경향"이 있다는 지적이다. 이런 입장에서라면, 오히려 게임은 그야말로 자본의 품 속에 흠뻑 빠져 있기에 어느 형식들보다도 더 근본적으로 '예술'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게임에 대해서만큼은 아도르노의 그 가정만큼 옳은 것도 없는게 아닐까... 싶은 것이다.
아... 모르겠고 그저 '게임으로 예술하는 사람들'이 (만일 있다면) 건강하길 바랄 따름이다.
예전에 어느 자리에선가 게임 플레이를 "노동이 되어가는 놀이"라는 관점에서 이야기를 풀어내는 걸 본 적이 있는데 약간 난삽한 감이 있어서 이해도 공감도 잘 안 되었었다. 나는 차라리 플레이는 애초부터 어느 정도 노동의 성격을 갖고 있지 않나 하고 생각하기도 한다. 자주 문화산업의 견지에서 게임을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여가, "통제감?을 제공하는 특수한 형태의 여가"라고 생각하곤 했는데 사실 통제감이란 다른게 아니고 "자유로운 표현"으로서의 노동, 소외되지 않은 노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그러면 이게 "노동인 여가"인 것 같은 것이다. 근데 생각해보면 의외로 이런 형태의 여가는 제법 많다. 그래서 게임만의 이야기를 하려면 뭔가 다른 지점들이 필요할 것 같다....
굴종과 배제로 자아낸 거대한 게임
한국의 미소지니 게이머들에게 무슨 대단한 신념이나 사상이 있는 것은 아닐 터이다. 그저 존중받고 있다는 착각을, 여러 회사들 돌려 쳐가며 받아내는 것일 뿐이다. 한국 게임 산업이 소비자에게도 생산자에게도 그래도 되는 판이 되어버린지는 제법 된 것 같다. 게임이 통제감을 공급하는 문화상품이라면, 아마 이것도 일종의 굴종과 배제로 자아낸 거대한 게임일 것이다.
시간적 인간
이런 식으로 말하면 아마 알아듣기도 힘들고 어폐도 있을 것 같긴 한데... 내게는 “한국의 대중문화상품은 너무 ‘역사적’이고 일본의 대중문화상품은 너무 ‘시간적’이다”라는 편견이 있는 것 같다.
100% 비슷한 이야기는 아닌 것 같긴 한데, 묘하게 ‘한국 대중문화는 역사적인 것을 좋아하고, 일본 대중문화는 시간적인 것을 좋아한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둘 중에 무엇이 낫다고 생각하진 않는데, 개인적으로 역사적인 것을 좋아하지만 시간적이거나 역사적이거나 마음에 와닿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라고 생각한다. 못 만들었을 때 역사적인 것은 따분하거나 게으르다고 느껴지고, 시간적인 것은 몹시 징그럽게 느껴진다는 그런 차이가 있다....
근데 그런 편견은 있다. 의식적으로 역사적인 것을 멀리하고 시간적인 것을 가까이하는 사람 치고 인간적으로 만나서 즐거웠다고 느낄 수 있었던 사람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우연인지는 몰라도 그런 사람은 대개 남성이었고.... 트위터에서 보리적 합수, 인셀, 금융충, 한남 등등 여러가지 이름으로 불리지만 나는 그래서 이들에 대해 ‘시간적 인간’이라는 범주를 쓸 때가 있다. 그 범주에서도 가장 특이한 경우겠지만.... 그래도 섬세한 시간적 인간이 게으른 역사적 인간보다 훨씬 낫다.
총을 껴안고 강에 몸을 던지는
게이머 커뮤니티에서 사물에서 따 온 캐릭터를 모으는 게임 종류를 하는 플레이어를 비하하는 말로 '~박이'라는 말이 있는 걸로 안다. "배박이"라든가 "총박이" 같은 그런 말들. 그런데 나는 엉뚱하게도 그런 표현을 들을 때 퍼뜩 자유시 참변(?!)이 생각난다.
어디서 들었는지 정확하지 않은데, 무장독립투쟁을 하던 이들에게 총은 목숨보다 소중했다고 한다. 지금도 '제2의 생명'이라고 부르지만 당시에는 구하는 것부터가 어려워서 그야말로 (비싼) 동포의 땀과 (전장에서 수습된 것이라면) 전우의 피로 만든 거나 마찬가지라고 해도 좋았을 정도라고 한다. 그러다보니 적대적이지 않은 세력에 의해서 일시로 일어나는 경우였다고 해도 무장해제를 하는 것을 몹시 꺼려했다고 한다. 물론 그 이전에 낯선 만리타향에서 함부로 무장해제를 하기가 힘든 점이 작용하겠지만....
자유시 참변에서 무장해체를 명받은 사할린 의용군에서는 기꺼이 무장해제를 당할 수도, 그렇다고 동포에게 총부리를 겨눌 수도 없는 병사들이 총을 껴안고 강에 몸을 던지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 비극을 알고 나니 총뭐...라는 비속어가 진짜 묘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자유시참변에 대해서는 되게 이상하게 설명하고 있는 (특히 극우 언론에서...) 경우가 많은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아주 소상하게 설명되어 있다. 만인만색 팟캐스트에서 에피소드 4개로 다루고 있기도 하고....
팟캐스트 🎧 만인만색 역사공작단 E229 "한인 빨치산, 시베리아 내전 속으로".
레디 플레이어 원
저는 레디 플레이어 원을 개봉 당시에 영화관에서 봤었는데, 그때도 '이 영화는 미래의 게임을 이야기하는게 아니고 과거의 대중문화를 이야기하는 영화구나'라는 생각을 했어요. 누군가 "굉장히 식상하고 여성주의적으로 봤을 때 실망스러운 영화"라고 했었는데, 어느 정도 공감하면서도 애초에 그러려고 만든 영화가 아닌, 작정하고 '식상'하기로 마음먹은 그런 영화라고 생각했었죠. 스필버그 감독이 '헐리우드 영화감독'으로서의 자신과, 그동안 함께 해 준 사람들에게 주는 선물 같은 영화.... 약간 "우리 아름다운 대중문화 했잖아" 같은 느낌이랄지.... 당시에 "더 포스트"도 상영중이었다는 사실이 무언가 떠오르게 만드는 그런 영화였다고 생각해요. 동전의 뒷면같은 거랄지. 쥬라기 공원과 쉰들러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