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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2019)

생소 (Sngso) 2020. 5. 4. 18:00

#1

얼마 전에 영화 〈기생충〉을 다 보았다. 제목에서부터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 떠오른다. 예전에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 대해, 누군가 “계급 우화”라는 짧은 댓글을 남긴 것이 생각난다. 그렇다면 아마 〈기생충〉은 계급 동화 정도 되지 않을까?

 

나는 원래 영화를 볼 때 감정이입을 잘 하지 못한다. 〈기생충〉을 보면서는 딱 두 번 감정이입이 잘 되는 순간이 있었다. 첫째는 근세(박명훈 분)가 기우(최우식 분)의 머리를 재차 수석으로 내려치는 장면(옆에 누가 있었더라면 민망했을 정도로 움찔했다), 그리고 기우가 아버지 기택(송강호 분)의 메시지를 받고 자신의 ‘계획’을 늘어놓는 장면이다.

 

기우의 독백을 들으며 나는 스멀스멀 올라오는 화를 참아야 했다. 기우의 계획(혹은 무계획)은 독백을 따라서 화면에 비춰진다. 기우 가족은 저택으로 ‘돌아오고’, 볕을 쬐며 지하 벙커에 갇혀 있었을 아버지를 기다린다. 이 계획이 터무니없고 환상적으로 느껴지면 느껴질수록 실제 내 앞에 놓인 계급의 벽이 더 높게, 단단하게 느껴지는 그런 기분이었다. 이미 기우의 (무)계획에는 가장 중요한 것이 빠져 있다.

 

〈기생충〉은 그렇게 나의 기분을 성공적으로 잡친 재미있는 이야기였다. 역사(저택의 지하 벙커), 피와 이데올로기(“리스퓈!”)가 스며든 그 공간에서 밤마다 하나의 유령이 기어나와 저택을 배회하고 있다. 오래된 것들이 어떻게 새로이 귀환할 것인가? 궁금하다면 일단 오래 살아남고 볼 일인가 싶다.

 

#2

나는 짜파구리라는 음식을 언제 처음 먹었을까? 2013년 재보궐 선거를 앞두고, 노원병 지역구에 출마한 김지선 후보의 배우자인 노회찬 전 의원이 부인을 위해 짜파구리를 끓였다는 이야기를 소셜 미디어에서 본 것 같다. 그 때 자취를 하던 나도 호기심에 한 번 끓여먹었지만 라면 두 봉지를 한 끼니를 위해 뜯는 것도 어색하고, 내 입맛에는 영 아니었는지 그 이후로 다시는 찾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영화 〈기생충〉에 짜파구리가 등장했을 때 묘하게 착잡했었다. 갑작스럽게 돌아오는 차 안에서 연교(조여정 분)는 충숙(장혜진 분)에게 전화를 걸어 짜파구리를 끓여달라고 부탁한다. 전화를 끊고 당황한 기색을 애써 감추며 충숙은 묻는다. “짜파구리가 뭐야?” 노회찬이 짜파구리를 끓이던 때로부터 〈기생충〉이 개봉할 때까지, 노동자를 대변했어야 할 한국 진보정치는 외부의 압력, 내부의 무능과 파국으로 점차 영락해갔고 정치과정에서 노동자는 소외되어갔다. 이러한 한국의 상황이 연교가 충숙에게 짜파구리를 끓여달라고 하는 장면을 더욱 착잡하게 느껴지도록 했던 모양이다.1)

 

짜파게티와 너구리를 함께 쓰는 짜파구리라는 레시피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짜파구리가 존재하기 이전부터 여러 인스턴트 라면들을 섞는 조리법들은 존재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인스턴트 기성품의 틈바구니 속에서 그럴싸한 ‘조리’ 과정과 사람 사이로 전해지는 ‘레시피’는 그야말로 대중적(popular)이면서 동시에 민속적(folk)인 식문화였을 것이다. 2) 그러나 〈기생충〉의 짜파구리 씬은 이러한 대중문화들이 한국 사회에서 거꾸로 전유되어 오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짜파구리라는 식문화는 선택적으로, ‘채끝살이 올려진 채로’ 연교의 식탁에 오른다. 짜파구리에서 민속적이고 계급적인 부분은 탈각되고 그렇게 전유된 문화는 노동계급에게 다시 낯선 것으로 다가온다. “짜파구리가 뭐야?”3)

 

해리 해리스 주한 미대사가 아카데미 시상식을 보며 짜파구리를 먹는 장면을 인터넷으로 보면서, 〈기생충〉의 짜파구리를 보며 떠올랐던 착잡한 심정이 다시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그가 짜파구리를 먹는 것이 불편한 것이 아니라, 〈기생충〉이 드러낸 하위계급문화의 되먹임이 그대로 다시 재현되는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누구 말마따나 〈기생충〉은 아카데미에서 또 한 번 반복되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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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봉준호 감독이 민주노동당 당적을 가진 적이 있을 정도로 진보정당에 대해 관심이 있었다면, 2013년의 ‘짜파구리’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2) 음식을 조리한다는 것은 인격적인 과정이다. 나는 『쫓겨난 사람들』(매튜 데스몬스, 2016)이 다시 떠오른다. 식료품 구매권으로 매일의 끼니를 사는 대신 신선하고 비싼 식재를 사 직접 조리해 먹고 나머지 한 달을 굶으며 살았다는 러레인의 이야기다.

3) 또 한편 생각해보면, 가사노동에 능숙한 무산자 여성인 충숙이 짜파구리가 무엇인지 모른다는 설정은 내게 매우 설득력이 있었다. (거기까지 신경쓴 것일지는 모르겠지만) '짜파구리'라는 음식이 가진 미묘한 위치, 또 계급적으로 환원되지 않는 그 특징을 절묘하게 나타내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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